[칼럼] 나는 나를 모른다

MBTI의 신빙성 문제에도 불구하고 대유행

'나는 나를 모른다'는 것은 비문이 아니다

정찬영 기자

작성 2020.07.05 18:20 수정 2020.07.07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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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새부터인가 MBTI라는 심리검사가 청년층을 중심으로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MBTI는 마이어-브릭스 유형지표(Myers-Briggs Type Indicator)의 약자이다. 이름 그대로 미국의 심리학자였던 캐서린 브릭스와 그의 딸인 이사벨 마이어가 만든 심리분석지표이다. 여기서는 인간의 성격을 4가지 이분적 지표를 통하여 총 16가지로 분류한다. 이 지표에 따르면 개개인은 결국 이 16가지의 심리유형 중 하나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개인의 성격이 주어진 16가지의 선택지 중 하나에 끼워맞춰지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외향적인 성격의 사람이라한들 어색한 자리에서 내향적으로 행동할 수도 있고, 내향적인 성격의 사람도 편안한 분위기에서는 외향적으로 행동할 수 있지 않을까? 애초에 인간의 심리를 분석하기에 16가지의 선택지는 너무 폭이 좁다는 것이 필자의 의견이다. 거기에 더해 MBTI는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이론으로 알려져 있다. MBTI는 카를 융의 초기 실험심리학을 바탕으로 태동했고 이는 현대의 정립된 심리학과는 뿌리를 전혀 달리 한다. 직관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실용적 가치가 부족한 지표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MBTI에 열광하는가? '그냥 재미로 한다'라는 가벼운 명목의 이면에는 사실 무거운 사회적 현상이 담겨있을지 모른다. 사람의 심리는 생각보다 자기암시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긍정적인 자기암시는 본인을 즐거운 상태로 만들고, 반대로 부정적인 암시는 본인을 피폐하게 만든다. 처음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를 발견했던 '에밀 쿠에(Emile Coue)'는 이러한 현상을 학문적으로 정립시켜 '자기암시법'이라는 심리치료요법을 창시하기도 했다.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베스트셀러 '더 시크릿'도 결국 플라시보 효과를 주된 근거로 채택하고 있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실제로 '할 수 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MBTI 검사결과로 도출된 본인의 심리유형 또한 본인에게 자기암시와 같은 작용을 한다. '나는 이런 유형의 사람이구나'라는 작은 암시가 반복되다보면 점차 자신이 그런 유형의 사람이라고 믿게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인지 부조화의 발생이다. '나는 외향적인 사람이야'라고 암시를 건 사람이 본인이 믿고 있던 자신의 성격과 마찰을 일으키는 상황을 만나게 된다면 심리와 태도의 부조화를 느낀다. 이러한 경향은 반복될 수록 자기확증편향이 되며, 상반되는 결과를 확인할 때마다 심리적 불편감을 느끼며 자리합리화를 하게 된다. 결국 나 자신에 대해 돌아볼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스스로의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나를 소개할 때에도 MBTI의 검사결과를 '재미로'라도 차용한다면 또한 문제가 발생한다. 상대도 나를 어떤 유형의 인간으로 유형화시킬 수 있고, 결과적으로 상반되는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대인관계에서 실망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심리적 유형화'의 오류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심리테스트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해답은 현대사회에서 상실된 자아정체성에 있다고 본다. 종종 주변 지인들에게 앞으로의 진로나 꿈에 대해서 묻는 상황이 발생한다. 예외도 있지만 절반이 넘는 경우에 '잘 모르겠다'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 경험적인 근거는 오류가 발생하기 마련이지만 적어도 필자의 주변에는 꿈을 찾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더 넓게 보아 사회적으로도 진로상담소, 진로컨설팅 등이 버젓이 운영되고 있는 것을 보면 마냥 비약적인 일반화는 아닌 듯하다. 20~30년을 넘게 살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조차 모르는 것은 사실 정말 안타깝다. 개의 수명은 정말 오래 살아야 20년을 넘을까말까 하다. 그보다 훨씬 더 긴 세월을 사는 고등생명체로서 자신의 취미, 흥미, 재능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살아가기 위해 돈벌이 수단을 찾는 것은 올바른 삶의 양상은 아닐 것이다.


 MBTI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은 이러한 '자신을 모르는 사회'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던 사람들은 심리테스트로라도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싶어한다. 매우 신빙성이 떨어지는 테스트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한번이라도 심리테스트를 해보고 '어, 이거 나랑 비슷한데?'라고 느껴본 사람은 테스트 결과로 도출된 몇 가지 문장에 내 자신이 끼워맞춰지는 듯한 느낌을 받아보았을 것이다.


 왜 이런 사회적 현상이 발생했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학창시절부터 지속되어 온 주입식 교육이 하나의 주된 요인일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챌 시간조차 없이 정해진 공간에서, 정해진 사람들을 만나고, 정해진 공부만 하는 것은 개개인의 자아탐구 과정을 방해할 수 있다. 성인이 되고 난 뒤에도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위해 돈벌이를 해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격증이나 어학시험 준비를 해야한다. 인턴과 공모전, 대외활동도 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착실히 대한민국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진다.  이쯤되면 사실 정체성이라는 것이 정말 중요한지조차도 모호해지는 대목이다.


 심리테스트를 하는 행위가 부정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심리테스트에서 찾지 말자는 것이 이 글의 주된 요지이다. 당장 눈앞의 고비들을 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를 탐구할 수 있는 시간은 분명히 있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가 아니라면 내가 나 자신을 돌아보고 탐구하여 개성있는 사람으로 만들어내는 수 밖에 없다. '나는 나를 모른다'라는 문장은 언뜻 보면 비문이지만 현대사회에서는 그 의미가 통하는 듯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외부의 것에 의지하지 않고 나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면 하는 것이 바램이다. 비로소 '나는 나를 모른다'가 완전한 비문이 되는 그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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